일본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 중 한 명이며, 무려 식인 범죄자였다.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커녕 자신의 살인행위를 소재를 이용하여 책과 CF, 방송에 이용하던 파렴치한 인물이다.
사가와 잇세이는 1949년 4월 26일 사가와 아키라(佐川 明)(1914 ~ 2005)의 장남으로 고베에서 태어났다. 매우 유복한 집이었지만 그의 집안이 선천적인 유전병이 있어서인지, 그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났던 누나는 생후 10일만에 사망했다. 누나가 사망한 이후 아버지의 나이 35세에 힘겹게 얻은 장남인지라 부모가 매우 애지중지 키웠다. 더욱이 개월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미숙아로 태어난 상태라 더더욱. 1년 뒤인 1950년에 남동생 사가와 준(佐川 純)이 태어났다.
워낙 유복한 집안인데다 어렵게 본 장남인지라 부모의 학업의욕이 엄청났는데,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공부는 열심히 해서 와코대학 문학과를 졸업 후 칸세이가쿠인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제3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범행 당시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다.
사실 범행을 저지르기 훨씬 이전인 이 시절에도 그는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적 도착증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으며, 고교 시절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인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자주 의논하기도 했지만, 의사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72년 와코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인근에 사는 중년의 독일인 여성을 잡아먹을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하였다. 하지만 여성은 수면 도중 기척을 느껴 잠에서 깼고, 습격당하기 전에 매우 왜소했던 사가와를 큰 피해없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때 당시 경찰 및 피해자 모두 그의 범행은 당연하게도 인육이 아닌 강간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그는 당시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가 지불한 합의금에 고소가 취하되었는데, 이때 그의 식인에 대한 환상 및 집착을 발견해 고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범행 과정
사가와 잇세이가 32세이던 1981년 6월 11일, 파리 제3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학급 동료였던 네덜란드 유학생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 당시 25세, 1956 ~ 1981)에게 잇세이는 독일 시 해석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며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인 키는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10cm 이상 작은 정도인 145cm 정도에 몸무게는 성인 여성의 평균 체중보다도 적은 35kg밖에 되지 않아, 남성치고 극단적으로 심각하게 왜소한 모습이었다. 컴플렉스가 있었던 그는 장신의 백인 여성에 병적으로 집착하였다. 그래서 178cm나 되는 큰 키에 아름다웠던 르네가 표적이 되었다.
그녀가 시를 읽고 있는 도중에 등 뒤에서 목에 소총을 쏴 그녀를 살해한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저질렀다. 백인 여성의 엉덩이가 먹고 싶었던 그는 시체를 먹기로 결심하고 시신의 둔부부터 깨물었는데, 생각보다 엉덩이가 단단한 나머지 잠시 밖으로 나가서 도축용 칼을 구입해 돌아와 시신을 차례차례 토막내기 시작했다.
둔부의 살을 도려내서 날로 먹은 뒤 매우 맛있다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했고, 가슴을 비롯한 여러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는데 일부는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신체의 거의 모든 부위를 섭취했고 여러 부위의 섭취 과정과 맛에 대한 평가가 자서전에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림을 느낄 정도이다.
6월 13일, 남은 시신을 여행 가방 둘에 나눠 담아 불로뉴의 숲에 있는 연못에 유기하려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그의 무거운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옮겨 담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 무게에 놀랐는지 뭔가 낌새가 이상하지만 설마 그럴까 싶었는지 "혹시 시체를 유기하려 근처 공원에 가시는 겁니까?"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목적한 공원에 도착한 그는 연못에 여행가방을 유기했지만, 우연히 그 공원에서 조깅하던 두 명의 목격자에게 유기된 여행가방이 발견되었다.
이후 여행가방에서 나온 토막된 시체 조각을 수사의 시작으로 조사를 펼친 결과, 사가와 잇세이의 짐가방을 옮겨주었던 택시기사의 증언으로 그를 추적하는데 성공, 자택 수사를 진행했고 집안 여러군데에서 조리돼있던 인육과 피해자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체포와 재판 (1981 ~ 1986)
다급해진 그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일본으로 도주하려 시도했지만, 이틀 후인 1981년 6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정신 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져 약 2년 동안 그 곳에서 머물다가,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기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심신상실로 처벌을 받기엔 부적합하다는 프랑스 법정의 판결에 의해 그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교도소가 아닌 앙리 코란 정신 병원에 무기한 입원 조치되었다.
이 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틈틈이 쓴 데뷔작 소설 "안개속"(霧の中)이 출간되었는데, 후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그리곤 1984년에 국외 추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고,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정상인이 맞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본 경찰은 사가와를 재판에 회부할 방침이었지만, 만악의 근원(...)인 프랑스 경찰 측은 불기소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의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 2년이 채 안된 1986년 8월 12일에 일본에서의 공식적인 처벌 및 기록이 남지 않은 채 깨끗이 퇴원하였다.
가관인 것은 그는 이 식인살인을 바탕으로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92년엔 일본의 방송인과 AV 제작자들이 그를 데려다 천박한 영상물을 찍어 팔기도 했다.
음침한 지하에서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마약에 취하고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하는 클럽인데, 그 장면 중 시체를 훼손하며 난교를 하는게 영화의 내용이다. 또 다른 영상으로 백인 AV 배우들이랑 상대하는 AMWF AV를 찍게 된다.
이후 일본에서 여러 식당에 관한 리뷰를 잡지에 쓰는 저널리스트 활동도 했는데, 방송에서는 이런 점을 눈여겨 봤던지, 그를 요리방송에 초대해 생고기를 맛보며 평가를 하는 프로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 그는 여성의 나체가 주된 그림들을 그려 돈을 벌었고, 2000년대 이후엔 자신의 살인 및 식인 체험담을 여러 매체로 지겹도록 우려먹고도 모자랐는지 직접 <만화 사가와 씨>(まんが サガワさん)이라는 만화로 그려 팔아먹기까지 했다.
투병 생활 (2013 ~ 2022)
하지만 숨통이 트인 것도 잠시, 64세이던 2013년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뇌경색으로 쓰러져 신경계에 영구 손상을 입은 채 죽는 순간까지 병원에서 링겔 꽂고 누워 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가와 잇세이 본인과 동생 사가와 준 모두 독신인데다 자녀가 없어서 부양해줄 사람이 없는 탓에 그나마 그를 딱하게 여긴 동생 사가와 준이 고용해준 간병인에 의해 보살핌 받으며 처절히 살아가고 있었다.
사망
2022년 11월 24일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유족에 의해 12월 2일 뒤늦게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장례식은 가족끼리 진행했다고 한다.
사가와 잇세이 본인에 대한 일본 대중의 인식이 스타 대접에서 흑역사 취급으로 바뀐 상황이다 보니,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한 편이다.
차라리 그가 작가 겸 방송인으로서 한창 좋은 의미로 인기를 끌던 전성기(1986년부터 1997년까지)에 사고나 피살 등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면 후대의 부정적 재평가와 별개로 적어도 그 당시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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