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곤은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세 번째로 태어나 부산 초량동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은 평범하게 지냈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찰관이 되어 권총을 차고 일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을 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에는 열등생이 되었고, 자해를 한 적도 있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한 우범곤은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대 후 경찰관이 되어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에서 일했으며,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서 청와대 경호에 근무했다. 그러나 거친 성격으로 인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고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 부산에서 근무할 때부터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술을 마시면 성격이 더욱 난폭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출된 후에도 술을 마시면 행패가 심해져서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1981년 12월 30일 오후 5시, 궁류지서로 전근한 우범곤은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하던 전양과 사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양의 가족들은 우범곤의 술버릇이 심각하여 두 사람의 교제에 반대했다. 우범곤은 술을 마시면 폭력을 일으키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가족들은 두 사람이 동거하기를 반대했다.
우범곤은 101경비단 소속으로 청와대 경호로 근무했었지만, 거친 성격 때문에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아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되고 전출 처리되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두 사람이 결혼한 뒤 함께 살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우범곤은 결혼 비용이 없어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우범곤은 집안이 가난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만약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된다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우범곤은 낮 12시경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거녀가 파리를 잡으려고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식히지 못한 채 오후 4시경 우범곤은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하고,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들어 말리자 언니의 뺨을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이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우범곤은 집을 나가게 되었다.
그 후, 지서로 향해 가던 중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분노에 찬 채 카빈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방위병들을 쏴내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8개 등을 탈취했다. 그 이후 우범곤은 범행을 저질렀다.
우범곤의 범행 중 가장 악랄한 것은 어린이와 갓난아기를 포함한 무차별적인 살인이었습니다. 그는 민가에 침입해 어린이들을 살해하거나, 평촌리 상갓집에서 20여명을 살해한 뒤 현장을 떠날 때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돌아와 아기를 쏴 죽였습니다.
또한,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면서 한 택시 기사는 "빨리 불을 끄세요, 지금 불을 안 끄면 다 죽어요"라며 집마다 돌아다니며 위험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충고대로 불을 끈 집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이 택시 기사는 우범곤에게 살해당한 뒤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간신히 불을 끄지 못한 집들도 결국 화를 당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경찰은 전대미문의 살상 사건에 대해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이 수십 명을 살해한 것으로, 이들은 궁류지서로 들어가 우범곤의 총격을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그러나 궁류지서 경찰들은 우범곤 순경이 이동한 반대 방향으로 출동하는 추태를 부렸으며, 여기에 방송을 하였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 이후 경찰들은 경찰 직무포기로 인정되어 처벌을 받았다.
의령경찰서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이 휘하 전투경찰순경 30명은 마을에 살던 의령군 민방위과 공무원의 살해 사건을 전파 받고 자정 무렵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있었다. 이후 경찰은 이를 매복이라고 변명했으나 여론은 이를 비판하였다. 이는 경찰이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1982년 당시 57세의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은 책임자로 있던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었다. 그러나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보고를 받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것을 듣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지서에 있는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밤 22시 24분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적어도 희생자의 절반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령서장은 경보 방송을 발령하거나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인근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 않고 내무부에만 상황 보고를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새벽 1시 20분,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서 일어난 궁류학살 사건에서 의령 경찰서장 최재윤 경정은 부산에서 있던 서장회의를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고, 범행 지역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지 않고, 지서 안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하거나,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도 않고, 상황 보고만 하였다.
새벽 2시,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큰일이 났다며 마을에 있던 의령 경찰들에게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시야가 확보가 안 된다는 이유로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가 없었으며 이 사건당시 경찰은 단 1발도 못 쐈다.
또한, 위 타임라인을 보면 우범곤이 26일 23시경부터 다음날 자폭하는 새벽 5시경 사이에 6시간 가량 범행을 실행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있었는데, 만약 그가 계속 날뛰었다면 경찰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피해가 몇 배로 훨씬 커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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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곤이 일으킨 이 사건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총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으며,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이 중 6명의 희생자는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우범곤은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전멸시키며, 시골 사회의 규모를 감안하면 상당한 피해를 남겼다. 이 살인사건은 조상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 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가족들을 모두 잃고 일가 중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희생자들 중 많은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20세 이하의 희생자가 16명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으며, 생후 1개월 된 갓난아기를 포함한 10세 이하의 희생자는 6명이었다.
우범곤의 비참한 최후와 함께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살인을 저지른 우범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며 사망했고, 집배원과 그의 부인은 우범곤에게 살해당하며 세 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이에 추가적으로 의령 지방 내 여러 가족들은 일가족이 몰살되거나 가족들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 등의 비극적인 상황을 겪었다.
이 사건은 조상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 마을의 특성상 규모가 큰 피해를 가져왔으며, 미혼으로 사망한 첫 번째 희생자와 교환원은 영혼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마을 주민 중 하나가 우범곤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이었고, 술만 마시면 경찰서를 찾아 한풀이를 하다가 가는 등 경찰서를 자주 방문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우범곤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 근무복을 입고 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날은 마을 주민들이 반상회를 하느라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한 기강 해이로 인해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 당시는 무장공비가 출몰하던 시기여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으며, 경찰인 우범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어도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 중인 것으로 인식했다. 이에 피해가 더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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