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두는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2004년 유영철 사건 발생 전까지 3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뺏었다. 이판능이나 우범곤은 대량살인으로 분류되며, 정신질환자로 평가되어 제외되었다. 그러나 김대두는 제정신인 상태에서 10명 이상의 연쇄살인을 저지른 최초의 범인이다. 일가족을 몰살하는 범죄나 사람을 4명 이상 살해하는 범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10명 이상을 살해한 범인은 김대두가 처음이다.
김대두는 1949년 11월 17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했지만 김대두는 공부에 대한 의욕이 없어 탈선을 이어갔다. 그래서 아버지는 광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지만 김대두의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김대두는 17세 때 중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농사 일을 돕다가 돈을 벌고 싶어졌다. 그래서 목포 한 가구점에서 취업하여 일을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둔 후 전라도에서 머슴 일을 하거나 품삯을 받아 심부름을 하고 양복점의 직원으로도 일했다.
김대두는 고향에서 며칠을 보낸 뒤 서울로 이사하여 전셋집을 얻고 무직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폭력 사건에 휘말려 전과 2범의 범죄자가 되어 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두 차례 수감되었다. 주변에서는 전과자로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어려운 생활로 인해 도움을 청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소외감과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돈이 없어 군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당시 군면제가 많아서 허약한 체질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김대두는 1975년 8월 12일 강도 목적으로 처음 살인을 저질렀다. 이후 55일 동안 아이들을 포함한 17명을 살해하고, 특히 경기도의 외딴 집을 주요 범행 대상으로 삼아 1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 야수의 짓이라고 비난했다.
김대두는 첫 살인 후 교도소 동기 김해운과 함께 돌아다니며 또 다른 살인을 저질렀다. 둘은 서울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의기투합해 기차를 타고 이동했으나 얼마 못 가 헤어졌다. 김대두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10월 8일 검거 되었다.
김대두는 검거되기 하루 전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청년을 만나 공범을 제안하지만 청년이 그의 물건을 훔쳐 도망가자 살해하고 청바지를 벗겨 가져갔다. 그러나 청바지가 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세탁소에 맡긴 후, 세탁소 직원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직후에도 청바지에 묻은 피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을 바꾸었다. 처음엔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친구와 싸워서 피를 흘렸다고 주장하다가 이후에는 동네 뒷골목에서 불량배들에게 구타를 당해서 피를 흘렸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대두가 불량배들과의 싸움으로 피를 흘린다는 변명을 했지만, 이에 대해 수사를 진행해도 관련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대두는 결국 형사와 함께 탕수육과 고량주를 먹다가 자백하며, 그동안 저질렀던 연쇄살인 행각을 밝혔다. 이후 공범인 김해운도 체포되었다. 서울시경찰국 형사기동대에게 사건이 넘어가고, 대대적인 수사가 펼쳐졌다. 검거당일 박경원 내무장관과 참모부장이 청량리서를 방문해 축제분위기를 보였으며, 김대두를 검거한 홍세호 형사는 경장으로 1계급 특진하게 되었다.
김대두의 주요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1975년 8월 13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잠을 자고 있던 노부부를 습격하여 도망치려는 남성을 낫으로 살해하고 절구의 공이로 부인을 때려 중상을 입힌 뒤 손전등 하나를 훔쳐 도주.
1975년 8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의 한 구멍가게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노부부와 7살 손자를 살해한 뒤 250원을 훔치고 가게의 과자와 음료수, 빵 등을 무전취식
1975년 9월 7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현 중랑구 면목동)으로 올라와 친척 누나의 집에 머물던 도중 근처에서 홀로 집에 거주하던 남성(60)을 살해.
1975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현 평택시)에서 할머니(71)와 딸(40), 손주들을 습격하여 5살, 7살, 11살 손자손녀 포함 일가족 5명을 살해. 11살 손녀는 집 밖의 나무에 묶여 강간 시도 후 살해 당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다른 4명의 희생자들은 망치로 살해당했는데 장도리의 손잡이가 부러질 정도로 내리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된 상태였다.
1975년 9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현 구리시)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20대 부부와 자녀인 3살 아기 등 3명을 살해하고 아내의 모친과 할머니 등 2명에게 상해를 입힘
1975년 9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현 군포시)에서 생후 3개월 된 여자아이와 그녀의 어머니(28)를 습격하여 어머니는 강간한 뒤 살해하였고, 아이는 울음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둔기로 내리친 뒤 짓밟아 장 파열로 숨지게 하고 집에서 2300원 가량을 훔쳐 도주
1975년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에서 30대 부부를 습격하여 남편(38)을 그 자리에서 둔기와 칼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숨지게 하였으며 아내(37)는 옷을 벗겨 나체로 집 밖의 야산으로 끌고 나가 양 손을 결박한 뒤 살해.
1975년 10월 3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여성(21)을 습격하여 강간을 시도하였으나 피해 여성이 지나가는 차량을 보고 도움을 요청해서 상해를 입히는 데에 그침.
1975년 10월 7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공범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남성 1명을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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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두는 위 사건 목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들을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프로파일러들은 김대두가 아이들이 울면서 내는 공포스러운 소리를 듣는 것을 즐기는 이상한 성향이 있다고 추측했다. 반면, 김대두와 비슷한 범인인 유영철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범행 도중 만난 어린 아이들은 살려두었다.
검거된 김대두는 경찰 조사에서 모든 죄를 자백하며 현장검증에서는 껌을 씹으며 웃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김대두의 범행 수법은 매우 어처구니 없었는데, 그는 외딴집에 사는 가족들을 몰살하고 돈을 빼앗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때로는 손전등 하나나 고추 15근만을 훔치기도 했으며, 구멍가게를 습격하여 먹을 것들로 배를 채운 뒤 250원만을 훔쳐간 적도 있었다. 이전의 강도살인자들과는 달리 김대두는 중상류층을 주로 노리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이 제때 잡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의 연쇄살인 작가 표창원은 김대두가 배운 게 없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유사한 환경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김대두와 공범 김해운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김해운이 한 건만 가담했고 김대두의 반 강요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해운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그 이후 김해운은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김대두는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76년 12월 28일에 방영근 등 25명의 미집행 사형수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당시 다수가 살해된 사건의 주범은 신속한 사형 집행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사형 확정 후 9개월 만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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