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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이야기

순국의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by CleanHub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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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교육자로, 1932년 4월에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3QkKYFtKEQ&pp=ygUJ7Jyk67SJ6ri4

윤봉길은 충청남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계몽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윤봉길은 계몽 운동과 문맹 퇴치를 위해 월진회를 조직하고 야학과 강습회를 열며 지역사회에 기여했습니다.

 

1908년에 태어난 윤봉길은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외국인 교사의 차별적인 교육과 환경에 불만을 느끼고 3.1운동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동네에서 글자를 모르는 농부를 보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그는 월진회를 조직하고 야학과 강습회를 통해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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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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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김구와 만났으며, 만주에서도 사회 활동을 펼쳤습니다. 상하이에서는 일본의 천장절 기념식에 폭탄 투척 작전을 성공시켰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윤봉길은 이봉창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에 묻혔습니다.

 

일본군은 최근 이봉창의 암살 시도로 위기를 느끼고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외에는 물건을 가져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때 투척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습니다.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윤봉길이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윤봉길의 조카인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거류민단장인 카와바타 테이지는 직격으로 폭탄을 맞아 복부와 다리에 중상을 입어 다음날 3시 10분에 사망하였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5월 26일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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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는 오른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육군 제9사단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은 왼쪽 다리를 잃어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이때 부상을 입은 생존자 중 노무라 제독과 시게미츠 공사는 각각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는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가 조력자로 나서 윤봉길을 자신의 자동차에 태워 홍커우 공원으로 운전했습니다. 그는 이후 독일인 욘 라베와 함께 난징 대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폭탄 투척 직전 김구와의 마지막 조찬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회중시계로 바꿔 품에 넣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봉길은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라며 김구에게 선물하였고, 김구가 돈을 거절하자 윤봉길은 "자동차 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8.15 광복 이후, 김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윤봉길 생가를 찾아 윤봉길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윤봉길이 교환했던 시계를 보여주면서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김원상 여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구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고, 이후에도 시계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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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던 윤봉길의 시계는 윤봉길의 후손에 의해 가져와져 현재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윤봉길은 이후에 일본 군민과 관료들을 제거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헌병들은 엄청난 구타를 가하고, 이후에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육군 군법회의에서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11월 18일에는 일본기선 '타이요마루(大洋丸)'에 호송되어 오사카에 도착하고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2월 18일에는 카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마구치 다카시가 출판한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따르면, 사실 윤봉길을 체포한 직후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즉결처형하려 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그러나 이로 인해 자신을 희생한 순국자의 이미지가 돋보이고 일본군의 침략 이미지가 강화될까 염려했던 나머지, 이감 다음날인 19일에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윤봉길에게 사형을 집행했다고 합니다. 이때 윤봉길은 24세로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아 13분 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부에 따르면 윤의사에게 흰 천을 둘러 미간을 쏘고 붉은 피가 나오게 만든 것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나자와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은 폭탄 투척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시라카와 장군의 세력 근거지에서 그가 병상에서 사망한 시각에 맞추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윤봉길의 시신을 계단 바로 밑에 묻었는데, 지나가면서 윤봉길을 밟으며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일제는 심지어 순국자마저 욕되게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이후에 유해는 카나자와시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재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찾아졌습니다. 유해의 위치를 찾기 위해 시도했지만 묘목이 없어 난항을 겪었고, 결국 유해는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근처 쓰레기 하치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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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뼈가 소나무 뿌리에 얽혀 수습하지 못한 손뼈 7개가 남아있지만, 현재까지도 윤봉길의 무덤은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윤봉길의 사망지역 주변에는 지금도 윤봉길 기념비와 그가 총살당한 장소를 기리기 위한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박성조라는 재일교포가 동창들을 찾아가 수소문을 했고, 그 결과 윤봉길이 총살집행 시 진노라는 육군 헌병이 당당한 태도로 걸어가며 무슨 염불 같은 것을 외우고 눈가리개는 필요 없다고 거부했다는 증언을 얻었습니다.

 

진노는 도쿄에 살고 있던 동생에게 연락하여 윤봉길이 독경을 해 준 여승이가 계셨다는 정보를 전하였고, 이 정보를 토대로 윤봉길의 유해를 찾아냈습니다.

 

1946년 5월 15일, 이봉창과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윤봉길의 유해가 고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부산에서는 추도식이 열리고, 6월 16일에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 대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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