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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이야기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호실장 차지철의 생애와 사망배경

by CleanHub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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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제4공화국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하며 당대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0.26 사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DGG7kqbJ8&pp=ygUQ7LCo7KeA7LKgIOycoeyEsQ%3D%3D

차지철은 어머니가 소실인 서자로 태어나 소실된 출신으로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겪었지만,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입학하려 했으나 낙방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창들에 따르면 무식한 이미지와는 달리 공부를 잘했으며 무술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출신 때문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나 출신을 높이 평가하기 위해 노력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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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생애와 피살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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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는 공수특전단에 배치되고, 1960년에는 선진국의 특수 훈련과 리더십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레인저 스쿨에 입교했습니다. 그 당시 교육생들 사이에 발생한 인종차별 사건에서 동료를 떡실신시키는 무술 실력으로 사태를 해결한 일도 있었습니다.

차지철
차지철

군에서 전역한 이후에도 정치로 진출하며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차장이 되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으로 임명되고 소령, 중령으로 진급한 차지철은 1963년에 민주공화당으로부터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에는 국민대학교와 한양대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차지철은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펼쳤다는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깔끔하고 세련된 외모를 가진 성격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KBS 1TV 인물현대사에서는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모습이 나왔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차지철이 김두한과 진짜로 붙은 적은 없었고, 만약 붙었다면 그 결과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4.19 혁명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활동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과의 웃통 사건을 소개했다. 김두한은 당시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이었으며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베트남 전쟁 파병 때 여당 내에서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반대는 처음에는 박정희의 쇼를 위한 것으로 시작했으나, 차지철이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면서 진짜 반대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미협상력은 높아지고 미국은 약속대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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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냈는데 당시에는 36살의 나이로 재선의원으로서는 매우 젊은 편이었습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여파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하자, 차지철은 이에 책임을 지고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경호실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뒤, 박정희는 차지철의 위상을 높여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심지어 차관급인 현역 중장을 경호차장으로 임명하고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했습니다.

차지철
차지철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차지철이라는 인물의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1974년에 취임한 이후, 차지철은 과도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마련하고 여야 유력 정치인,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더 나아가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경호원가'를 만들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1975년에는 박근혜가 가사 거북함을 이유로 가사 부르지 말라고 전달했을 때, 차지철은 대통령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부르도록 하겠다며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역시 차지철의 묻지마 충성 앞에서 타협안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1978년에 시작된 경호실과 수경사의 합동국기하강식은 차지철의 기행의 정점으로 꼽히며, 차지철은 매주 월요일 아침 경복궁 연병장에서 국기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차지철 주위로는 민주공화당 중진과 장관들이 함께한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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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는 법령이 개정되어 수도경비사령부의 지휘체계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간섭할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이는 일개 민간인인 차지철이 군의 수도 방어 부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차지철은 군 내부에서 불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절대권력과 지지를 받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1979년에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이후, 차지철은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차지철은 종이에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독극물이 묻었을지 모른다는 핑계로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서와 결제서류를 중간에서 감독했습니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고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계원이 부총리급에서 좌천되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김계원의 비서실장으로 위치는 김정렴과 경제의 마에스트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박정희가 김계원을 불러들인 것이 김재규와의 군시절 친분 때문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권의 정점은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고,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에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로 부렸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차지철의 월권 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하며 분노했습니다.

차지철
차지철

차지철은 박정희를 지키기 위해 상식 밖의 일들을 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밤 중의 전차 시위는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켜 서울 시민들이 자고 있는 새벽 시간에 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습니다.

 

이로써 인근 주민들은 처음에는 전쟁이 난 줄로 오해하고 불안해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 기자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차지철은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위압감을 심어줌으로써 박정희의 불가침의 성역임을 강조하려는 시위였던 것입니다.

2023.10.23 - [궁금한이야기] - 1979년 궁정동 10.26 사건  박정희 대통령 살인사건 김재규 최후진술 차지철

 

1979년 궁정동 10.26 사건  박정희 대통령 살인사건 김재규 최후진술 차지철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2층 연회장에서 발생한 사건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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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재규는 부마 항쟁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발언한 내용에 대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박정희가 발표한 발언에 동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이 발언을 언급한 장소와 시간에 대한 추가 증언을 하지 않았으며, 이 발언이 감형을 받기 위한 거짓 증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차지철은 박정희를 제외하면 아무도 윗사람이 없다는 태도로 행동했습니다. 김재규뿐만 아니라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조차 자기 아랫사람인양 대하였는데, 특히 김재규는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서 기수를 중시하는 군부 출신으로서 차지철의 월권 행위를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 내에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사건 직후에는 김재규를 포함한 여러 인사들이 처음에는 '차지철이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오해로 수경사 병력을 동원하여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시켰고,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차지철을 '그 놈의 새끼'로 불러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2023.10.23 - [궁금한이야기] -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전 대통령 5대 대통령 취임기간의 사건들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전 대통령 5대 대통령 취임기간의 사건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군사정변은 대한민국 제2야전군과 제1야전군의 일부를 포함한 여러 군부대가 대한민국 정부와 시설을 장악하기 위해 이탈하여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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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두환 역시 사적으로 노태우에게 차지철이 암살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전하며 의심의 여지를 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지철의 전횡은 군 내부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차지철은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지만, 총격이 시작되자 대통령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큰 논란이었습니다. 차지철은 오른쪽 팔에 총을 맞은 후에도 바로 화장실로 도주해버리면서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는 경호실장으로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에게 병기를 뽑는 자를 제압해야 할 상황에서 도망친 것이었기에 더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김재규의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켰고, 현장에는 경호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이 무술 유단자로 힘이 있는 상황에서 총을 들고 있는 김재규에 대해 제압하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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