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는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로, 윤봉길과 함께 김구 휘하의 한인애국단 일원으로 활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용산의 문창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하면서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취했습니다.
청년 시절의 이봉창은 처음에는 일본을 좋아하며 조선인 정체성을 버리고 한국계 일본인처럼 살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 될 것이라 믿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구사하며 일본인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을 경험하며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에 실망하고 박탈감을 느낀 4년간의 용산역 근무 기간 동안 조선인 차별에 반발하고 철도국에서 사직하게 됩니다.
2023.11.14 - [궁금한이야기] - 순국의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순국의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교육자로, 1932년 4월에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
cleanhub.tistory.com
특히, 쇼와 덴노 즉위식 당시 한글 편지를 소지하고 있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주일간의 유치장 생활을 겪었고, 이 사건이 인생에서 큰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쇼와의 즉위식 당시 구금된 기간은 1928년 11월 7일부터 11월 15일까지였습니다.
이후 31세 때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었고, 상하이에 있는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임정과 접촉했습니다. 그러나 외모와 제스처, 능숙한 일본어로 일본인 같은 인상을 주어 임정 인사들의 의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구만이 그를 믿어주고 이봉창과의 대화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당시 일본인 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왜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고,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들머쥐었습니다.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떠날 때는 일본 경찰이 부두에서 나와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는 등, 인간 관계망은 상당히 폭넓은 편이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임정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을 밀정이라고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사와 직접 대접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제 이봉창의 의거는 사쿠라다몬이 아니라 거리에서 90미터 떨어진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이름이 붙은 이유는 황궁 바로 맞은편이자 치안총본부 현관 앞에서 천황 암살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1931년에 경시청 구 청사가 완공되면서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경찰이 이를 우려한 결과로 생겨난 이름입니다.
1931년 12월 13일 선서식 후 이봉창 의사는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잠입했고, 도쿄에서는 가와사키에서 숙박했습니다.
2023.11.14 - [궁금한이야기] - 대한민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업적
대한민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업적
유관순열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1902년에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영명학당에서의 학문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16년, 미국 여성 감
cleanhub.tistory.com
이봉창 의사는 치안 기관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에서 머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치밀한 계획은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졌고, 이를 알아낸 일본 경찰은 이봉창 의사의 신중함에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도쿄 교외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폭탄이 명중한 마차는 히로히토 천황이 타고 지나간 1번째 마차가 아니었고, 이봉창 의사는 천황의 행차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폭탄은 2번째 마차를 명중시켰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1번째 마차에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도착하자 일본인으로 오인된 한 사람을 보호하려다 이봉창 의사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자백했습니다. 가지고 온 폭탄 중 하나는 일본 경찰에게 전달한 후 체포되었습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공식 취조는 1932년 1월 8일 오후 3시 50분에 시작되었으며,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상태에서 경시청 형사부장이 직접 취조를 진행했습니다.
이때 중국의 신문 <민국일보>는 "이봉창이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불행'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상적인 일본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일본은 상하이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행해진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 행사에서 윤봉길이 참가한 뒤에도 물통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그를 비난했던 신문 기사를 실은 중앙일보사 사장이 여운형이었다는 미사여구가 있었으나 이는 거짓이었습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에 출옥된 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고, 1933년 3월 7일에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변경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사장임과 이봉창 의거 사건이 발생한 1932년 1월 사이에 모순이 생겼습니다.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2023.11.13 - [궁금한이야기] - 10.26사건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의 생애와 사망 배경
10.26사건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의 생애와 사망 배경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cleanhub.tistory.com
1932년 9월 16일, 대심원은 이봉창 의사의 사건에 대한 제1차 공판을 개최했습니다.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가운데에서 이봉창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죄명은 대역죄였습니다. 당시 이봉창 의사는 32세로 어린 나이에 사형당했습니다.
1933년 12월생인 여운형이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날보다 이봉창 의거 사건이 발생한 1932년 1월에 더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만약 쇼와 덴노가 죽었다면 유복자로 출생한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쇼와 덴노가 폭사했다면 황위는 남동생들에게 넘어갔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원 역사에서는 야스히토와 노부히토, 다카히토의 세 형제가 차례로 황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다카히토가 살아 황위를 유지했지만, 세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야스히토, 노부히토, 다카히토의 자녀 여부가 원 역사와 동일하다면 다카히토를 끝으로 황실 남계는 단절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야스히토와 노부히토는 처음부터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하는 압박이 적었을 뿐, 쇼와 덴노가 살아 있다면 황실의 안위를 위해 자녀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때 다카히토는 자녀를 낳기 위한 압박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쇼와 덴노가 죽었다면 정해진 상대와 결혼하여 황실을 이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제의 현임 군주가 조선인 독립운동가에 의해 피살되면서 한반도의 일제 통치에 큰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봉창 의사는 한일 양국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봉창 의거 이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집단은 조선의 친일파였습니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한 여러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찾아가 불경범인이 조선 출신인 것에 대해 사과하고,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하여 궁성 입구에서 직접 사죄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2023.11.13 - [궁금한이야기] -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호실장 차지철의 생애와 사망배경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호실장 차지철의 생애와 사망배경
차지철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제4공화국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하며 당대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0.26 사건에서
cleanhub.tistory.com
국내의 친일 세력들도 1월 9일에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서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당 사건을 자신들이 계획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로 인해 지원이 차단되면서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팔아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 이후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찾아,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을 파견하고 돈을 지원받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천황은 극우파에게 숭배받는 존재로,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대 권위의 천황이 암살 위기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거나 해임당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자 순국이었지만, 일본 당국의 시각에서는 중대한 보안 위협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2023.11.12 - [궁금한이야기] - 박정희 전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생애와 피살 사건의 전말
박정희 전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생애와 피살 사건의 전말
육영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이자 대한민국의 제5-8대 대통령 영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은 김호남이었으며, 그 외에 이현란과도 사실혼 관
cleanhub.tistory.com
광복 이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로부터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회수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와 함께 안장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경성부 #히로히토 #조선총독부 #한인거류민단 #쇼와천황 #아사야마쇼이치 #이봉창 #무장투쟁
'궁금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좌진의 만주 독립운동과 대한광복회 활동,만주에서의 투쟁과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역할 (1) | 2023.12.03 |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영향: 팔레스타인 내부의 갈등 (2) | 2023.11.24 |
순국의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1) | 2023.11.14 |
대한민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업적 (1) | 2023.11.14 |
10.26사건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의 생애와 사망 배경 (2) | 2023.11.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