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살해한 10.26 사건의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MrOujhTLzA&pp=ygUW6rmA7J6s6recIOy1nO2bhOynhOyIoA%3D%3D
김재규는 1924년 4월 9일에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장으로는 송음 김형철과 권유금 부부의 세 번째 아들로 자랐습니다.
김형철은 당시에 정미소를 운영하며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진 인물로, 김재규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김재규는 1943년에 안동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에 수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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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김재규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고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54년에는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다시 만났습니다.
군에서의 경력은 10.26 사건 이전에도 있었는데, 1951년에는 9사단에서 박정희와 함께 근무하고 있었고, 5사단 근무 당시에는 연대 보급창고에서 발생한 물자 소실 사건에서 박정희가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46년에 조선경비대 참위로 임관한 김재규는 군경체육대회에서 미군에 대한 차별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충돌하였습니다. 이후 권총을 들이대는 미군 장교에 맞서고 충돌하자 자진사임하였습니다.
이후 교사로 일하며 일상을 보냈으며, 복직 후에는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6.25 전쟁 중에는 2대대를 지휘하여 의정부, 대구, 영덕에서 북한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여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57년에는 육군대학 부총장을 역임하였으며,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 1.21 사태 후 방첩부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71년 8월에는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를 받았습니다.
3군단장 시절에는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하였으며, 이로 인해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으며,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처음에는 그의 이름이 있었지만 10.26 사건 이후에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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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는 3군단장을 끝으로 육군 중장 계급으로 전역하고,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10개월 후에는 신직수의 중앙정보부장 취임에 따라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의원직을 사퇴하였습니다.
1974년 9월에는 건설부 장관으로 개각되었고, 이때 해외건설 계약고를 끌어올려 근정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1976년 12월에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긴급조치 10호 건의는 반려당하였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하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해당 보고서는 2012년에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최순실이 박근혜와 함께 기업들로부터 돈을 횡령한 사건과 유사한 양상으로, 40년 전인 1979년에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은 박근혜와 공모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자금을 탈취했습니다.
이는 최태민의 사기행각이 그의 딸인 최순실에 의해 2016년까지 계속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최태민의 범죄행위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군사정권의 지배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 박근혜에 대한 비판은 소수의 관료를 제외하고는 드물었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도 김재규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할 만큼 박근혜는 일반적인 정치인이 아닌 육영수의 후계자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박근혜는 공주의 이미지를 넘어 육영수의 현신으로 여겨지며, 10.26 사건 당시 노인들은 그를 공주로 칭하여 큰절을 올리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습니다. 더 나아가 김재규는 박근혜의 국정 농단에 분노하여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분리하라고 직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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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듣지 않고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임명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채용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가 최태민과 박근혜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둔 행동이 자신에게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김재규는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대통령의 왼팔로 불리우는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지배하는 지위에서 사이비 교주를 처벌하는 것이라면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김재규가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최태민(박근혜)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김재규에게는 충성심이 바닥이 날 정도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인 자신보다 사이비 종교인을 신뢰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10.26 사건의 동기 중 하나는 박정희가 최태민과 박근혜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지하고도 이를 정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김재규는 주장했습니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계속될 경우 잠재적인 위험성을 인지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했지만, 이러한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 헌정사에 가장 악명높은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김재규는 결국 안가에서의 암살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의외로도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이동했습니다. 만약 그가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암살한 사실을 숨기고 불순세력의 행동으로 몰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그릴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중앙정보부로 이동한 후에, 차지철이 암살의 주동자로 조작되어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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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를 미명으로 여러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저질렀으며, 쿠데타가 발생하면 주요 우익 세력의 주도자로 지목되는 등 미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10.26 사건이 터진 후 김계원 비서실장이 대통령 유고를 듣고 김치열 법무장관이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이라고 말한 것은 차지철을 가리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때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에서 내란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박정희를 살해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특히 판사 양병호와 서윤홍은 김재규의 행동이 내란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너무 어설프다는 입장이었고, 최종판결 당시 민윤기 등 6명의 판사들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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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수의견을 낸 판사들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법복을 벗어나야 했으며, 특히 양병호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양병호는 훗날 "김재규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당시 판결문은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 있었지만, 훗날 공개되면서 당시 몇몇 재판관들의 용기 있는 소수의견들이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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