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이자 대한민국의 제5-8대 대통령 영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은 김호남이었으며, 그 외에 이현란과도 사실혼 관계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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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박정희가 이현란과 김호남과 이별한 이후 만난 여성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남매인 박근령과 박지만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육영수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피살된 대통령 배우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총탄에 피살되었습니다.
1925년 11월 29일에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난 육영수는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셋째 차녀로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정은 지방 대지주집이었으며, 육종관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소작농을 착취하고 부를 쌓아 뒷뜰 역할을 하는 과수원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육종관은 총 12남 10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육영수는 적녀로서 부유한 가정에서의 여러 여자 관계와 가족의 복잡한 사정을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육영수는 남편인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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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배화고는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설립한 개신교(감리회) 미션스쿨로,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였습니다. 또한, 그녀가 졸업한 학교는 청와대에 매우 가까워 교문을 통과하면 청와대가 보이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시절, 육영수의 거처는 육종관의 집 중에서도 '큰 개성댁'이었습니다. 비록 집주인은 육종관이었지만, 서울에 머무는 동안 실질적인 가정은 큰 개성댁이었고, 이로 인해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였습니다.
육종관의 부재 시, 육영수는 서모(庶母)와 적녀(嫡女) 사이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으며, 큰 개성댁은 육영수가 서울에서 보낸 물자를 도중에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중 4년간 부모에게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육영수가 배화고등여학교에 재학하던 동안, 학교에서는 일본으로의 수학여행이 있었는데, 이에 육영수는 매우 가고 싶어했지만 육종관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육영수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졸업 1년 전 육종관은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낼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육영수는 아버지의 결정에 분노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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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육영수는 옥천으로 내려와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육종관은 육영수를 매우 신임하여 그녀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고 사실상의 비서, 경리로 일하도록 했습니다. 육영수는 교사로 일하면서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육종관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8월, 송재천 소령을 통해 박정희와 만난 육영수는 당시 박정희가 이미 김호남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박정희와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육영수를 만나기 전에 김호남과 결혼하고 있었지만, 그 결혼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가족의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육영수와 박정희는 6.25 전쟁 후, 박정희가 군대에서 복귀하여 대구와 부산을 왔다갔다 하며 근무하던 시기에 만났습니다. 육영수의 사촌 오빠이자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 육영수가 피란 중인 소식을 듣고, 그녀가 육종관의 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박정희에게 소개했습니다.
육영수와 박정희는 그 후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정식으로 맞선은 아니었지만 박정희는 육영수의 우아하고 고상한 외모에 강한 호감을 느꼈습니다. 결혼은 1950년 12월 12일에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렸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33세, 육영수는 25세였습니다. 결혼식에서는 허억 전 대구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을 혼동하여 실수하는 일화가 있었으며, 일부 방송에서도 육영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에는 육영수의 사촌 오빠가 결혼식 전날 반지를 잃어버려 급하게 새 반지를 사야 했고, 육종관은 군인인 박정희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라며 결사반대했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육종관은 박정희를 자신의 가문에 인정하지 않았고,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임명되고 나서도 청와대에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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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서의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결연한 의지로 결혼을 이루었습니다. 육영수는 결혼식 당일 위경련으로 얼굴이 부은 사건이 있었지만, 이는 일시적인 후유증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박정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한 결과에 대해 비극적인 운명을 예언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육종관은 죽음이 가까워진 시점에서 박정희에게 사과했습니다. 병문안을 받은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아들 육인수 전 의원의 창성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가 들었던 예언이 실현된 결과로, 딸인 육영수와 그의 남편인 박정희는 실제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직후, 육영수와 박정희는 노량진에서 살며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군인 출신인 박정희와 함께 구멍가게도 잠시 운영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의 생활에 도전했습니다.
육영수는 식구가 늘면서 신당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 대문이 작아 박정희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자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고쳤다고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육영수는 박정희에게 자존심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박근혜가 태어난 1952년에는 여전히 노량진에 살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육영수는 박정희의 전처인 박재옥을 도와 뒷바라지를 맡아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재옥은 박정희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 중 하나로, 결혼 후 한병기와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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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박정희 정부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방송인 봉두완과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봉두완은 육영수가 나환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기여한 데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모방송 뉴스에서는 육영수가 나환자들을 위해 공중 목욕탕을 지어준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육영수는 청와대에서 민원 처리와 통치의 일환으로 많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대통령 배우자로서 그녀가 일상적인 정무에 참여하며 박정희를 지지하고 도왔음을 나타냅니다.
청와대에서의 업무 외에도 육영수는 고아원과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황태자의 처 이방자 여사와 함께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73년, 육영수는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제공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1971년에는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센인촌과 1972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여 한센인들의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 힘쓰기도 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관심과 노력은 당시 한센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았던 상황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었고, 특히 육영수의 노력은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1974년 광복절 29주년을 맞이한 날, 육영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에 피해 사망하였습니다. 육영수의 노동은 한센병 환자들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육영수의 따뜻한 마음과 노력으로 소록도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소록도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강세 지역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가 유일하게 지지를 얻은 도양읍 제7투표소가 존재하였습니다. 이는 육영수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의 행적이 계속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영수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 육영수에 대한 비판을 자중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육영수의 아들인 박지만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등 가족 간의 다양한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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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던 육영수는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분노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제4공화국 수립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29주년이었던 날에 일어났습니다. 육영수의 사인은 두부관통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육영수의 죽음에는 그녀와 함께 합창단에 참여하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서울특별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었습니다.
원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는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면서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이 모든 계획은 육영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조문객 수만이 200만에 이르는 인파가 몰렸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육영수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와 슬픔이 국내를 강타했습니다. 문세광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인지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반공주의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또한, 문세광이 재일교포 출신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국민들은 분노의 향을 일본 쪽으로도 돌리게 되었습니다. 국민적 여론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도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 여권을 발급한 일본 측에 책임을 묻고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는 대한민국에 외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며 사과의 뜻을 표시했고, 미국은 한일 관계가 파국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육영수 국민장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의 시신이 담긴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청와대 철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전통 장례 예법상 아내가 남편보다 먼저 죽은 경우, 남편이 집 대문 앞에서 아내의 관을 전송하고 장지까진 따라가지 않는 관례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육영수의 죽음은 그의 아내뿐만 아니라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까지도 포함하여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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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또한 서울특별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었는데, 원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는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육영수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문세광의 행동이 북한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속에서 반공주의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또한, 문세광이 재일교포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국민적 분노가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 여권을 발급한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묻고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는 대한민국에 외교 특사를 파견하여 사과와 사건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친필 편지를 전했습니다. 미국도 한일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서며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육영수 국민장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의 시신이 담긴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청와대 철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엿보였습니다. 이는 전통 장례 예법상 아내가 남편보다 먼저 죽은 경우, 남편이 집 대문 앞에서 아내의 관을 전송하고 장지까진 따라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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