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궁금한이야기

순국선열 의열단 항일무장운동 김상옥의 생애와 업적

by CleanHub 2023. 11. 6.
반응형
반응형

김상옥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그의 활약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으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을 공격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계기를 제공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이 펼쳐졌으며, 그는 당시 쌍권총을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유명합니다.

 

김상옥은 1890년 1월 5일에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구한 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과 독립유공자인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2023.11.06 - [미스테리,사건사고] - 14좌 등반 전문 산악인 철의여인 클라이머 고미영

 

14좌 등반 전문 산악인 철의여인 클라이머 고미영

고미영은 대한민국의 여성 산악인으로, 한국 여성 산악계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성 산악인으로서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3개를 등정하는 기록

cleanhub.tistory.com

그는 한학을 공부하면서 어의동보통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4세부터는 낮에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으며, 경성영어학교에서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에 정진주와 결혼했습니다.

 

1917년에는 물산장려운동과 일화(일본 제품 사용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하여 보급하였습니다.

 

그 당시 말총모자의 판매 수익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의 철물점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거점이 되었으며, 다른 제품들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며 국산 제품을 장려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김상옥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한 시기는 3.1 운동 이후였습니다. 3.1 운동 당시에는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고 배포하며, 철공소 직원 50명과 함께 시위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4월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독립운동을 계몽하고 고취시키기 위해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라는 저널을 발간했습니다. 1919년 12월에는 일본 고관 및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처단을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고, 1920년 4월에는 서씨 등을 총살하였습니다. 또한, 조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습니다.

 

1920년 8월 24일에는 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기 위해 내한하는 소식을 접하자, 김상옥은 동지들과 함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2023.11.05 - [미스테리,사건사고] - '고문은 예술이다.' 군사독재시절 악랄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은 예술이다.' 군사독재시절 악랄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이근안은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이자 목사로, 독재정권 시기에 공안경찰(현 보안경찰)로 재직하며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얻었습니다. 노덕술이 일제강점기 친

cleanhub.tistory.com

그러나 이 암살 계획은 일본 경찰에게 들키기 전에 중단되었으며, 김상옥은 단독으로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1920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며, 의열단에 입단하였습니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 국내로 돌아와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모펀트 거사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폭발로 인해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행인 6명과 여성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마루야마 경무국장과 오하라 검사 등의 수사로 조사되었으나, 당시에는 공격의 주범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의 은신처를 추적하였습니다. 은신처는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밝혀졌으며, 1월 17일에 경찰에 탐지되었습니다.

의열단 김상옥
의열단 김상옥

1월 22일 새벽에는 일본 경찰의 포위망에 김상옥의 마지막 은신처도 발각되었습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여러 명의 무장 경관과 함께 은신처를 중심으로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침입하였습니다.

 

김상옥은 은신처에서 탈출하면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는 맨 먼저 경찰 중 한 명을 사살하고, 이후 여러 명의 경찰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히며 은신처를 빠져나왔습니다.

 

경찰은 군대를 동원하여 더욱 강화된 포위망을 구축하였지만, 김상옥은 겁에 질리지 않고 미끄러진 남산을 넘어가 금호동의 안장사로 가서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상을 빌려 입은 뒤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월 22일 새벽, 김상옥의 마지막 은신처도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습니다. 은신처의 위치가 드러나면서 최후의 순국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경찰은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를 동원하여 은신처를 포위하였으며, 김상옥은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2023.11.05 - [미스테리,사건사고] - 일제강점기 반민족 친일 인간쓰레기 고문기술자 하판락

 

일제강점기 반민족 친일 인간쓰레기 고문기술자 하판락

하판락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독립운동가와 기독교도를 가혹하게 고문하며 나쁜 평판을 얻었던 친일 경찰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부유한 사업가로 살아갔다는 사실이 밝혀

cleanhub.tistory.com

마지막 결투에서 김상옥은 권총 2자루를 사용하며 다수의 경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는 경찰과 격투하며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을 다 사용하면서 스스로 머리에 1발의 총알을 쏘아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사망 당시 여전히 양손에 권총을 쥐고 있어 경관들을 겁에 떨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최후까지 그의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김상옥의 시신을 보고 경찰들조차도 그의 용기와 결단력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순국하여 남긴 이야기는 그의 활약을 추억하며 기리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상옥의 폭탄 투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사례에 대한 주장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김상옥의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의견은 이 폭탄 투척은 일종의 실험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실험은 제조된 폭탄의 위력을 시험하거나,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를 목표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김상옥의 폭탄 투척은 그 당시 독립운동 단체에서는 드물게 사용되는 고성능 폭탄이었습니다. 이 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는데, 당시로서는 김상옥의 의열단만이 이 정도의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023.11.01 - [미스테리,사건사고] - 탑승자 전원사망 1982년 발생한 제주 C-123 수송기 추락사고

 

탑승자 전원사망 1982년 발생한 제주 C-123 수송기 추락사고

1982년 2월 5일, 제주 C-123 추락사고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에서 어두운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고는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육군 장병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탑승한 C-123 수송

cleanhub.tistory.com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김상옥이 무술과 총을 다루는 데 능숙했던 것입니다. 그는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으로 때려눕히고 검을 빼앗는 등 무술에 능했으며, 총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능력은 그의 활약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입니다.

 

또한 김상옥은 동료 장규동의 원한을 갚기 위해 관을 사오라는 김구의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권총을 구입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독립을 위해 관보다는 무기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상옥의 순국하는 모습은 그의 용기와 결단력을 대표하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순국하기 직전까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있어 경관들조차 다가가지 못했으며, 어머니를 통해 그의 생사를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김상옥이 얼마나 두려움 없이 싸움을 벌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김상옥의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기리고 존경받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김상옥 #의열단 #암살 #독립운동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쌍권총 #자결 #항일운동 #순국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