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으로 인해 3년간 숙청된 사람만 최소 25,000명 이상이고 직접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3,000명에 달합니다. 많은 주민들이 공안기관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하고 정치범수용소에 갇혔으며,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터진 평양시 룡성구역의 이름을 따서 '룡성 사건'으로도 불립니다.
2023.12.03 - [궁금한이야기] - 김좌진의 만주 독립운동과 대한광복회 활동,만주에서의 투쟁과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역할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은 군통수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죽음은 김정일의 권력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유훈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김일성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문화예술부장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김일성 세대의 항일유격투쟁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여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 부문에서는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복형제 김평일의 등장은 김정일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김평일은 김일성과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김일성의 지지도를 받았습니다. 또한, 김평일은 군 부문에서 활약하여 군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김정일이 권력을 확장하면서 그의 결점이 드러났습니다. 김정일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독단주의자로 비춰졌습니다.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은 다른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2023.11.24 - [궁금한이야기]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영향: 팔레스타인 내부의 갈등
1997년 초에 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되고 채문덕이 책임자로 올랐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전국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하고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첫 희생자는 당시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히였습니다.
서관히는 당시 김정일이 비료를 사오라고 내린 300만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교화 생활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화조는 서관히를 다시 불러내어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의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에서 가혹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한 서관히는 '자신이 서북청년단 잔당이며, 북한 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비료값을 횡령했다'는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이에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미 1984년에 사망한 김만금도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자백이 나왔으며, 전 평안남도 당위원장 피창린, 전 개성시 당 책임비서 김기선, 전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구까지 서북청년당 잔당이었다는 진술이 나왔습니다.
2023.11.21 - [미스테리,사건사고] - 2006년 천안 토막살인사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더욱 무자비한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채문덕에게 김일성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요 안건은 직접 보고 받겠다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강성산을 해임하고 신뢰하는 측근들을 중요한 직책에 올렸습니다.
이렇게 김정일의 독단적인 행동은 북한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특히 1998년에는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배급이 중단되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사회안전성 본부를 강화하고 민심을 제어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시행착오를 일으켰고, 이에 대한 김일성의 측근들의 비난은 깊어졌습니다.
채문덕과 장성택은 본격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견제해온 중앙당 책임비서 문성술을 겨냥했습니다. 문성술은 북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채문덕과 장성택은 권력에 도전하며 문성술과 그의 일가족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했습니다. 이것이 숙청 작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숙청은 불길을 피우며 전개되었습니다. 채문덕과 장성택은 문성술 계파의 각 인물을 남조선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며 숙청을 집행했습니다.
처형은 즉시 시작되었고, 김만금부터 시작해 이미 안장된 애국열사까지 총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김만금의 경우는 특히 주목할 만한데, 그는 북한의 농업 부문에 충실하게 종사한 뒤 6.25 전쟁 중에는 평양의 조상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업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은혜로 돌려받지 못하고 총격을 당했습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역적으로 몰리며 억울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심화조는 문성술과 관련된 인물들을 가혹하게 고문했습니다. 자신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이기지 못한 자들은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어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족들은 사회안전성 교화국으로 옮겨져 관리되었습니다.
또한 서관히와 백설희의 사건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백설희는 공개처형되었고,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약 40%가 처형 전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한 사회를 광풍에 휩싸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목숨을 앗아가며 고통을 안겼습니다.
고문의 잔학한 형벌 중 하나로 양팔과 양다리를 뒤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 늑골을 군화발로 밟아 부러지게 하는 고문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자백하지 않으면 부러진 뼈를 계속해서 밟아 찢어내는 잔인한 고문이 진행되었습니다.
2023.11.20 - [미스테리,사건사고] - 2016년 조성호가 벌인 안산 대부도 살인 사건의 전말
이 과정에서 부러진 뼈가 내장에 박혀 내출혈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하는 비참한 일도 발생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죽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몫까지 자백을 시키면 되기 때문에 고문은 점점 더 잔인해지며 사망자가 속출했습니다.
숙청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문성술은 고문 중에 사망한데, 그가 자백하기 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자 채문덕은 문성술의 시신에서 손가락을 잘라내 자백서에 인장을 찍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정도로 심화조 사건은 무법의 극치에 이르렀습니다. 심화조에 체포된 간첩들이 많아져 공개 처형이 어려워지자 심화조는 감옥에 총살대를 보내 감옥 내에서 집행되었습니다. 이 모든 학살을 진두지휘한 배후는 장성택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목표를 달성한 채문덕과 집행 간부들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이어서 불순분자를 계속 색출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심화조 사건은 평양 간부들과 주민들의 반문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인민보안성을 개칭하고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2023.11.19 - [미스테리,사건사고] - 2004년 벌어진 전용술의 마산 대학교수 살인사건 해부
심화조 사건 조사를 통해 채문덕의 개인적인 원한이 이 사건에 이용되었음을 확인하고, 2000년 초에 채문덕은 처형되었습니다. 그 후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도 전격 체포되었고, 각종 형량이 내려졌습니다.
이로써 심화조 사건은 김정일의 권력 강화를 위한 친위 쿠데타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가 안전 보위를 위한 것이라는 속임수로 김정일의 목적을 숨기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심화조 #김정일 #채문덕 #숙청 #사회안전성 #김일성 #룡성사건 #장성택 #북한 #인민공화국
'미스테리,사건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공화국, 인권유린과 학대의 참상을 보여준 서산개척단 사건 (1) | 2024.04.08 |
---|---|
2006년 천안 토막살인사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1) | 2023.11.21 |
2008년 발생한 포항시 흥해 살인사건의 미스터리 (2) | 2023.11.20 |
2016년 조성호가 벌인 안산 대부도 살인 사건의 전말 (2) | 2023.11.20 |
2004년 벌어진 전용술의 마산 대학교수 살인사건 해부 (1) | 2023.1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