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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사건사고

제3공화국, 인권유린과 학대의 참상을 보여준 서산개척단 사건

by CleanHub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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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 대한청소년개척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조직된 것으로, 그 배경에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농산물을 처리해야 했던 과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한국차량주식회사 전무를 지낸 민정식을 통해 개척단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이 개척단은 양아치와 창녀들을 대거 모아 서해안의 일대를 개간하는 명목으로 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개척사업은 인권 침해와 가혹행위를 동반했습니다. 경찰과 같은 공권력은 후리가리라 불리는 방식으로 아무렇게나 사람들을 붙잡아 노역을 시켰고, 주로 통행금지를 어겼다는 이유로 잡힌 소시민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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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건설용 중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바다를 메우는 식의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고,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는 간척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개척단원들은 중노동과 함께 아이들의 유소년기까지 건설 현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여자들도 취업사기에 빠져 공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업자들은 이를 이용해 노동력을 갈취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혹한 현실은 대한뉴스 등을 통해 선전되었으며, 대한청소년개척단은 정부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개척단 내부의 영양상태는 매우 열악했습니다. 밥은 작은 그릇에 보리밥을 대충 퍼주는 정도였고, 반찬으로는 소금국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찬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다른 음식을 갈망했고, 이를 위해 개척단원들은 소에게 주어야 할 사료를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소가 굶어가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고, 굶주린 상태의 개척단원들은 생존을 위해 어떠한 종류의 음식이든 마다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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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의 생활환경 또한 매우 열악했습니다. 천막은 엉망이었고, 비가 오면 천막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었습니다.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협박과 폭행이 빈번했고, 겨울에는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습니다. 폭행은 인간 샌드백으로 이어지며, 죽을 때까지 맞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역자들을 감시하거나 도망을 막는 구호반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철조망 뒤에서 소총을 들고 경계를 섰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구호반에게 맞아 죽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로 인해 개척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개척단의 외부에서 찾아온 친지나 가족들도 구호단에 의해 돌려보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군 장교조차 이들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묻혔고, 이로 인해 우천시 시신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아무렇게나 묻혀서 부패가 진행되거나 생매장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면산 지역은 과거에 공원묘지로 단장되었습니다. 이때 굴삭 작업 중에는 수백 구의 뼈가 발굴되었습니다. 이 뼈들은 무연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서산희망공원묘지 꼭대기에 매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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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식은 개척단을 이끄는 동안 대한청소년개척단 이전에 을지로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대한청소년 기술보도회를 조직하여 정비공장에 청소년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운영하면서 많은 자금을 획득하자, 그는 이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정식은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며, 미국산 잉여 농산물을 받을 명분으로 청소년개척단을 악용했습니다. 그는 지원받은 양곡을 횡령하여 민간업자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또한 지역 경찰들에게 돈을 주고 뇌물을 주었으며, 이는 충청남도청과 서산군청에서 민정식을 비하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였으며, 경찰서장과 군수까지 따라다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산을 제외한 전국에서는 대한뉴스 등을 통해 '깡패와 창녀들의 새출발을 위한 양지'로 홍보되었지만, 이는 모월리 지역 주민들에게는 다른 시각으로 다가왔습니다. 개척단 캠프는 폐쇄적이며, 지역 공권력의 터치를 받지 않아 초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양한 괴담이 돌았고, 개척단은 모월리 주민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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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게도 개척단 행군을 구경할 수 있던 선주민들은 간수들이 노역자를 채찍질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개척단 구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된 여성 노역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구호단들의 추적을 두려워하며 도와주기 힘들었습니다.

 

정부가 간척한 땅은 면적이 약 250만m²인데, 오늘날의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지구로 변모했습니다. 개척단이 터를 잡아 원주민이 되었지만, 정부는 개척한 사람들에게 땅을 보상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국유지로 처리하여 보상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생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했지만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장기분할 '저리 매각'방식으로 땅을 처리하여 일부 보상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땅을 팔지 않을 것을 선언하여 상황을 분명히 했습니다.

 

수십 년간 노력하며 가족과 인생을 잃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몇몇은 실태를 알리려고 했지만 무산되었습니다. 생존자 유재문씨는 군복무 중에 실태를 알리려 했지만 방송작가의 거부로 인해 침묵했습니다. 김씨는 수기를 작성하여 KBS에 제출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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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제4공화국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하며 당대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0.26 사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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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끈 민정식은 국무총리상을 수여받은 후 서비스공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족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밝혔으며 추적은 불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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