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은 조선 말기에서 일본 강점기에 이르는 교육자, 군인, 독립유공자로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1905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용감하고 날렵한 성격의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을 위해 삼종증조부를 방문했으나, 이때 이미 변절한 김종근의 뒤통수로 인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을 수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출옥 후에는 교육 사업에 참여하고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을 맡아 일본군과 교전하며 여러 차례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었고, 특히 1920년의 청산리 전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20년대 중후반에는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반공 노선으로 전환한 김좌진 장군은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활약했으며,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이를 이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공산주의자를 배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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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이 대중적으로는 반공주의 우익이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의 이념적인 입장은 더 복잡했습니다. 그는 특정 공산주의 단체와 대립하면서도 다른 공산주의 단체와는 다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서울 청년회와 합작하여 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하거나 조선 국내의 청년회파와 연계한 활동을 펼쳤으며, 1927년에는 소련과의 연계를 통해 직접 소련에 들어가고, 1928년부터는 공산주의 단체와의 협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자유평등을 위해 강권을 배척"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나키스트로 변화한 이후에는 폭력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는 "파괴, 암살, 폭동 등 일체 폭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일반민중을 혁명화하고, 혁명은 군사화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과 함께 "내외를 불문하고 합법운동과 기회주의자를 박멸할 것"이라는 과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김좌진 장군과 같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대 아나키스트들은 전투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정치인 암살과 같은 행동을 일삼았고, 국가나 정부에 반대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활동은 폭력성과 대안 사회를 향한 이상주의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는 가톨릭 교회 신부를 쏴죽이고 내부를 불태우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지만, 동시에 자치 대안 학교와 주민 복지 센터를 조직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아나키즘은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김좌진 장군의 행적은 그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아나키스트들 중에서도 일부에 해당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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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의 암살은 초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여겨졌지만, 연구를 통해 이 사건에는 복잡한 배경이 존재한다는 입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측근들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것에 대해 박상실 혼자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했습니다. 이들은 박상실의 앞에는 배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처음에는 김봉환이 그 배후로 지목되었습니다.
김봉환은 한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김일성이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를 통해 김봉환과 김일성은 다른 인물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김좌진 장군이 사망한 당시에 18세(1912년생)로 매우 어리기 때문에 암살 배후로 지목되기 어려웠습니다.
중국 자료의 공개와 함께 박상실의 실제 정체가 드러났는데, 그의 가명은 '공도진' 또는 '이복림'이었습니다. 이 둘이 동일한 인물인지를 밝히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연변대학 교수 김동화는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일본 내무 보고서와 공산당의 주장이 일치하는데,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김좌진 장군 암살의 원인이었다고 주장됩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신용하 명예교수는 공산단체 '적기단'의 배후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여러 부인과 후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두한, 현 국회의원이자 국회의원인 김을동은 김좌진 장군의 조카입니다. 김좌진 장군의 부인들인 오숙근과 나혜국은 광복 이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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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김좌진 장군의 가족은 정실 부인 오숙근의 장녀인 김석출, 첩 김계월의 장남인 김두한, 후처 나혜국의 아들인 김철한이 있습니다.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의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장군함'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외손자인 김도현은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공군 부사관이 되었으며, 다시 해군 장교로 임관하여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키, 외모, 능력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일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극비로 다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자료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 것은 김좌진 장군의 최측근인 이정이 그것을 알려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은식기는 손녀 김을동에 의해 1995년에 감정을 받았지만, 감정가를 통해 진품임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김좌진 장군과 관련된 가치 있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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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딴 '김좌진 장군부대'는 제26신병교육연대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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