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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예능

한국 대중가요의 제왕, 최고의 가수 조용필의 인생과 업적

by CleanHub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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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최고 거장, 살아있는 전설, 그리고 최고의 가수! 이 어떤 수식어를 사용해도 그 위대함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가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무수한 가수들이 존경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퍼스타, 한국 가요계의 진정한 거장인 조용필 선생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용필 선생님은 1950년에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났으며, 1968년 고등학교 시절에 미 8군의 기타리스트 및 가수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50년 이상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한 음악 활동과 전국 투어 콘서트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입니다.

 

조용필 형님의 특별함은 다른 가수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역대 가요대상에서 최다 수상한 가수로서, 20세기 가수 중에서도 가장 많은 히트 곡을 발표한 가수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가수들이 달성하지 못한 수많은 기록과 업적을 세우며 전설적인 가수로서 이름을 영원히 각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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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님의 본명은 이용석으로, 54년생으로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출신입니다. 그는 김연자와 함께 일본에서 트로트 한류의 1세대를 주도한 주역이자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트로트 뽕짝을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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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선생님의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5년에 발표되어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에는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첫 정규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하여 대형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히트를 기록하며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지금까지 정규 앨범만 19개를 발표했으며, 비정규 앨범을 포함하면 50개 이상에 달하는 수많은 곡을 선보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대표곡들을 가지고 있어 콘서트를 하루 이상 연속으로 개최해야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조용필 선생님의 대표곡 중 하나인 '모나리자'는 1988년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세련된 멜로디와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곡입니다.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허공' 때문에 몇몇 젊은 세대에서 그를 트로트 가수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시도하며 여러 방면으로 도전하는 가수입니다.

 

그의 곡 '미지의 세계'는 락, '정글 시티'는 팝, 발라드는 '슬픈 베아트리체' 등 다양한 음악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으며, 그의 음악은 블루스, 민요, 동요, 오페라,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조용필 형님이 직접 작곡한 곡은 100곡 이상으로, 그의 히트 곡들은 '모나리자', '고독한 러너',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등이며, 이러한 곡들은 여러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커버되며 그의 업적을 존경하고 따라가는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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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선생님은 그의 엄청난 음악 업적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왕"이나 "국민가수"로 불리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며, 단순히 "조용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고 합니다.

 

또한, 다른 기성 가수들이 현대의 아이돌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판할 때에도 "세대가 다르고 추구하는 음악도 다를 수밖에 없다"라며 이해하고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후배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를 번안하여 부를 때 "누가 제대로 잘 불렀냐"라는 질문에는 "각자가 곡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고 창법도 다르기에"라며 개별적인 해석과 창법을 존중하며 "잘 살려 불렀다고 본다"고 말합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1981년부터 KBS 가요톱텐, MBC 쇼 네트워크, SBS, M-net 등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80회나 차지한 것입니다. 특히, 2013년 발표된 "바운스"는 방송 출연 없이도 1위를 차지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각 공중파 방송사 역대 가요대상을 총 12회나 수상한 최다수상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1983년에는 KBS 가요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 1위를 하면서 곡당 1위 횟수 제한이 도입되었고,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와 MBC의 가수왕 자리를 계속 차지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는 연말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
조용필

조용필 본인이 계속해서 가수왕 자리를 차지하니까 후배들을 위해 가요 시상식에 자진해서 출연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1987년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로 확정되어 있었지만, 본인이 수상을 거부하여 다른 가수에게 양보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수상 이력 뿐만 아니라,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단일 앨범 100만 장 판매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1994년과 1999년에는 국내 최초로 음반 총 판매장 1,000만 장을 돌파하는 등, 총 2,000만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일본에서도 크게 활동하며 '오모이데 마이꼬'라는 곡으로 일본 전국에서 히트를 치고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의 연말 음악가요제인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 출전하고, 1990년에는 잠실 롯데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장년층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곡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곡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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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를 7번 매진시켜 관객 10만 명을 동원하는 등, 대규모 콘서트의 역대 최다 관객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로는 관객 10만 명을 동원해 잠실 주경기장 역대 최다 관객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에서는 스테프 5,200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 스크린, 무빙 스테이지 등 초대형 무대가 사용되어 잠실 주경기장을 무려 80m나 움직였다고 합니다.

 

조용필 선생님은 항상 최신 해외 공연무대를 분석하고 공부하는 데 집중하며, 무대 총감독과 같은 역할도 수행하는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이문세, 이승환, 싸이와 함께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으나 매진에 실패한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70년대에는 남진과 나훈아 시대가 '오빠부대'의 시초였다면, 80년대에 조용필 시대는 '오빠부대'가 더 조직적이고 활동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조용필 선생님은 사회 공헌 활동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의 치료를 지원하는 기부활동을 하며, 조용필 장학재단을 통해 연례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등을 통해 100억원 이상의 금액을 기부한 바 있으며, 이를 할 때에도 매스컴에 나서지 않고 조용필의 자선 활동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조용필 선생님은 4집 앨범 '비련'을 발매한 후에도 14세의 지체장애 여성을 위해 요양병원을 찾아가 직접 '비련'을 불러준 적이 있으며, 이때 부모에게 돈을 받지 않고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돈보다 더 비쌉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는 소록도를 두 번이나 방문하여 한센인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아름다운 일화도 있습니다. 현재는 주로 잠실 주경기장에서 대형 공연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디너 쇼도 개최했으며, 1984년 '조용필 하얏트 디너 쇼'가 최초의 디너 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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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디너쇼'라는 용어는 1963년 루이 암스트롱이 워커힐에서 개관 기념 공연을 할 때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60~70년대에는 국내 가수들의 단독 공연을 '리사이틀'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는 관객들이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감상하는 형식의 행사가 '디너 쇼'로 불리게 되었고, 국내 최초의 디너 쇼로 알려진 것은 1960년에 패티 김이 조선호텔에서 개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로는 조용필 선생님이 디너 쇼를 이끌다가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8일까지 제주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밀레니엄 디너 쇼를 끝으로 더 이상 개최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이유는 입체적인 무대 제작과 안전을 위한 이유로 본인이 원하는 무대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조용필 선생님은 항상 무대에서 최고의 공연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디너 쇼를 위해 매우 철저한 리허설을 하고, 관객에게 최고의 공연을 선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다고 합니다. 그의 열성적인 팬들은 두 번, 세 번이나 그의 디너 쇼를 보러 찾아오며,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미국 등에서도 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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