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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사건사고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by CleanHub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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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30일, 일본의 도카이촌에서 놀랄 만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은 무조건 안전하다'라는 일본의 안전 신화를 깨뜨린 사건으로, 당시 현장에 있던 작업자들은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었습니다.

 

이 장소는 JCO라는 핵연료 재처리 시설이 위치한 곳이었으며, 이 마을의 인구의 1/3은 원자력 관련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원자력 시설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처리 시설은 사용된 연료에서 재활용 가능한 물질을 추출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시설이었으며, 이것은 핵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본은 처음부터 핵 연료 재처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국제법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사건은 우라늄 처리 시설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곳은 일반 원자력 발전소용 연료 처리 시설과는 다른 시설이었습니다. 이 날 현장에는 3명의 작업자가 있었는데, 오우치 히사시, 시노하라 마사토, 그리고 다른 방에서 작업을 감독하던 요코카와 유타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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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명의 작업자는 3년 만에 핵 물질을 다루는 것이었지만, 회사는 작업자들의 자격 요건과 훈련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업자들은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 기술자들이었지만, 고농축 우라늄을 처리한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원래의 작업 매뉴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산화 우라늄 분말을 질산에 녹여 임계에 이르지 않도록 고안된 용해탑에서 섞은 후 유입량을 조절하는 저장조를 거쳐 일정한 간격으로 침전조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JCO 회사에서는 이 과정을 비효율적이라고 여겨 '어둠의 매뉴얼'이라고 불리는 대체 매뉴얼을 사용하도록 작업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이 대체 매뉴얼에 따라 작업을 하게 된 오우치와 시노하라, 그리고 요코카와는 원래의 공식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스테인리스 양동이에 직접 이산화 우라늄과 질산을 섞어 침전조로 넣는 위험한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작업은 일정한 간격으로 침전조로 용액을 넣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16kg의 용액이 쌓이면 위험한 중성자와 감마선 방출로 이어지는 통제 불능의 핵분열이 발생하는 초임계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수동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더라도, 천천히 용액을 침전조로 부어가면서 16kg를 넘지 않는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릅니다. 작업자들 또한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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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일 사용되던 원료가 18.8%라는 매우 고농축된 우라늄이었습니다. 작업자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35분, 침전조에 7번째 양동이를 부어넣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침전조의 우라늄 양은 16kg에 달했고, 결국 초임계 질량에 도달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핵 연쇄반응이 시작되고, 시골 마을 한 가운데에 노심이 노출된 원자로가 나타났습니다. 현장에 있던 세 명은 모두 초임계 질량이 되자 체렌코프 복사라고 하는 파란색 복사선을 관측하게 되었고, 공장 전체에선 감마선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경보음이 울린 즉시, 다른 방에서 현장을 감독하던 요코카와는 외쳤습니다. "도망쳐라!"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는 깔때기를 들고 있던 오우치 히사시와 용액을 붓던 시노하라 마사토는 즉시 방사선 관리구역 바깥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발생한 상태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어마무시한 중성자선과 감마선에 노출되었고, 특히 오우치 히사시는 17시버트, 시노하라 마사토는 10시버트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방에서 감독을 하던 요코카와 유타카는 다행히 이 둘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방사선 피폭을 당했습니다. 일반적으로 6시버트를 받으면 90% 사망하며,610시버트를 받으면 2주 내로 100% 사망하고, 1050시버트를 받으면 일주일 후에 100% 사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우치와 가장 가까웠던 17시버트를 받은 오우치와 1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던 시노하라는 둘 다 그 순간 사망이 확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장은 그야말로 카오스였습니다. 오우치와 시노하라는 즉각적으로 엄청난 통증, 구토, 호흡곤란 증상을 나타내며, 현장에서 그나마 떨어져 있던 요코카와도 두통을 호소했습니다. 오전 10시 43분에 JCO는 도카이촌 소방본부에 구조 요청을 했고, 구조대원들이 도착하여 작업자 3명을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그

 

러나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JCO는 자사 회사에서 임계사고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방관들에게 방사능 누출에 대한 경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방사능 대비조치를 하지 않은 소방관 3명 또한 30밀리시버트의 방사선 피폭을 당했고, 사고 발생 후 10분이 지난 이후에야 작업자들이 푸른 섬광을 보고 신고했을 때 JCO가 방사능 사고임을 인지했다고 합니다.

 

시간순으로 사건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0시 35분: 임계 사고가 발생
  • 11시 19분: 과기청에 JCO로부터 '사고 발생, 임계 가능성' 보고
  • 12시 30분: 주변 거주민에게 집 안에 있으라는 발령
  • 12시 41분: 오부치 수상이 최초 보고를 받음
  • 14시 30분: 사고에 대한 보고를 과기청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고
  • 4시간 반 이후: 공장 350m 인근 거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

그러나 다음 날까지 핵 연쇄반응이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0월 1일 새벽 1시 40분에 첫 현지 본부 대책 회의를 열고 작업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사건 현장에 투입되어 서로 교대로 침전조에 있는 용액을 빼고 침전조 위로 붕소 용액을 들이부었습니다. 붕소는 중성자를 흡수하고 임계 이하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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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초임계 상태에 방사능을 쬔 오우치와 시노하라, 그리고 요코카와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장에서 가장 많은 방사능에 노출된 오우치와 시노하라는 사망하게 되었고, 다른 방에서 관리 감독을 하던 요코카와는 다행히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오우치 히사시의 방사능 피폭 치료 과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오우치는 3명의 작업자 중에서 가장 많이 방사능에 노출된 상태였지만 침착한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잃지 않고 응급차에서 내린 후 병원까지 직접 걸어 들어가며 강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우치는 1964년생으로 당시 35세였으며 가족으로는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부모님, 형, 여동생,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꼼꼼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아내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7년 동안 교제한 뒤 결혼했습니다. 건강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고등학교 시절에는 럭비 선수로도 활약하며 몸을 단련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JCO에서 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내에게 JCO는 위험한 회사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도카이촌 방사능 사고
도카이촌 방사능 사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우치는 오른쪽 팔과 침샘이 부어오르는 정도의 부상만 보였습니다. 의료진들의 여러 질문에도 정상적으로 답하며 서로 쾌유를 빌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장 많이 방사능에 노출된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거나 "이런 방사능에 노출되면 백혈병 같은 병에 걸리나요?"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침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사건 당일 그는 "피곤하고 나른합니다."라는 무기력함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간호사들은 오우치가 너무 건강해 보이며 1개월 후에 퇴원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지만, 그의 외관과는 달리 그의 몸은 이미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6일째인 10월 5일, 오우치는 도쿄대학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의료진들은 오우치의 골수세포를 채취하고 현미경 사진을 찍었는데, 그 결과가 충격적이었습니다. 골수세포의 현미경 이미지는 정상적으로 염색체가 찍혀 있어야 했지만, 실제 사진에는 염색체가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있어서 인간의 염색체라고 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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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체는 모든 유전 정보가 담겨 있는 중요한 구성 요소로, 오우치는 피폭 순간에 몸의 설계도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염색체가 이 정도로 파괴된 경우, 그의 몸은 새로운 세포를 생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20년 차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중 한 명은 이미 오우치 히사시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예상했지만, 담당 주치의인 마에카와 카즈히코 박사와 도쿄대학병원의 의료진들은 오우치를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오우치의 겉모습과는 달리 치료 가능성에 희망을 품게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몸은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이틀만에 소변량이 감소하고 배가 부풀기 시작했으며 혈중 산소 농도도 감소하여 산소 호흡기를 달아야 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혈액 속의 백혈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면역 체계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며, 오우치는 이로 인해 감염에 취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오우치는 멸균실에 입원하게 되었고 의료진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백혈병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혈소판 수치도 감소하며 피폭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는 혈소판 수혈이 필요한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몸 안의 문제뿐만 아니라 피부도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피부가 계속 뜯어지고 벗겨지며 재생되지 않아 체액이 빠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골수 역시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면 피부가 같이 떨어지는 심각한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오우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지속적인 치료와 검사에 대한 고통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이따위 것들, 이제 싫어!" "치료, 뭐고 다 관두고 집으로 갈래!" "돌아갈 거라고!" 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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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 후 2주가 지난 시점에서 이미 이러한 현상은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초 피폭 당시에 엄청난 양의 중성자와 감마선이 그의 몸을 통과하면서 오우치의 DNA를 파괴하였고, 새로운 세포를 생성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위와 장 상피가 손상되고 내부 세포들이 사멸하며 대량의 설사와 탈수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오우치의 위로 투여한 영양액조차 소화되지 못하고 초록색의 물 형태로 배출되었습니다. 수분 손실로 인해 물과 전해질의 불균형이 발생했습니다. 1달이 넘어간 시점에서는 전신을 붕대와 거즈로 싸매고 주기적으로 갈아주어야 했으며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어 연고를 발라주어야 했습니다. 눈에서도 출혈이 발생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가장 피폭을 많이 받은 팔부터 시작하여 신체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방사선의 영향을 덜 받는 근육조차 손상되었습니다. 혈액에서는 미오글로빈이 녹아나와 신장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피폭 의료 전문가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조언을 제공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례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각 국가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처음 경험한 것으로, 당시 현장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우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몸의 순환을 돕기 위해 중증환자용 침대를 사용하고, 수혈 및 수분 공급을 시도했으며 진정제와 진통제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임상실험 중인 약물을 투여하고 피부 이식도 시도했습니다.

 

70매의 배양 피부를 이용하여 오른쪽 배와 발바닥에 이식하고, 여동생의 피부도 이식했지만, 이러한 조치로도 체액의 유실을 막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오우치는 결국 12월 21일 오후 11시 21분에 피폭 후 83일 만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우치의 힘든 시간은 더 이른 날, 11월 27일에도 3차례에 걸쳐 1시간 이상의 심정지와 소생을 겪는 등 지속적인 심장 문제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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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으로 인한 피부 손상과 장기 출혈로 인해 하루에 거의 10리터의 수분이 체외로 나가면서, 적혈구와 혈소판 등의 수혈이 반복되었고 염산도파민을 사용하여 소변을 유발시키는 등 강심제도 투여되었습니다. 심박수는 24시간 내내 120에 가깝게 유지되었으며 이는 마치 마라톤을 뛰는 것과 같은 고강도 운동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두 달에 걸쳐 계속되면서 심장에 무리가 갔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오우치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의료진도 3차례 심장마비 후 오우치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83일째 밤에 혈압이 급격히 낮아져 심장이 멈추었을 때, 미리 가족들에게 통보한 대로 더 이상의 소생 조치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심장은 피폭을 덜 받아 오우치는 83일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심장까지 피폭을 받았다면 생존 기간이 더 짧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우치를 부검한 의사 마사와 쇼고는 심장 조직에서 오우치의 생존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직접 체험하면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했습니다. 오우치의 생존을 기원하며 종이학 접기를 반복했지만, 거부당하는 등의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면회를 허용하긴 했지만, 오우치가 폐에 기관을 넣은 인공호흡기를 사용하게 된 이후에는 대화조차 불가능해졌다고 합니다.

 

3개월 동안의 투병 끝에 오우치는 숨을 거두었고, 가족들은 슬픔에 빠진 채로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오우치의 부친은 아들과 함께 새 천년을 맞이하기로 했지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오우치 히사시는 일본 역사상 첫 임계사고 피폭 사망자로 남게 되었으며, 시노하라 마사토 역시 오우치의 부고를 듣고 슬퍼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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