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한민국의 범서방파를 주도한 인물로, 전직 정치깡패로도 활동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5a1k0zgAs&pp=ygUJ6rmA7YOc7LSM
그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범서방파의 두목으로 활동하며 언론에서 3대 패밀리로 불리며 이름을 알렸던 폭력조직의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김태촌은 전라남도 담양에서 다섯 번째로 태어났으며 가정은 비국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목회활동을 하다가 경찰 파출소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고, 초등학교를 마치고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고등공민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중퇴하며 어려운 삶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다니며 개신교의 교리를 배우며 깊은 신앙심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깡패들로부터 억울하게 고통을 받아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것을 목격한 후, 신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 창문을 깨고 말았습니다. 그 후 운동을 시작하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어머니를 괴롭히던 깡패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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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도 다른 조직 폭력범들처럼 어린 시절에 소년원을 다닌 경력이 있으며, 조양은과 만난 것은 나중에 어떤 갈등을 일으켰으나 그런 후의 일입니다.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고, 조양은과의 관계에서 미묘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조양은은 김태촌보다 나이가 2세 어렸으며, 조양은은 조폭인 조창조-오종철 세력에 빠르게 합류하였고, 신상사파와의 대립으로 조양은은 유명세를 쌓게 되었습니다.
김태촌은 이동재를 이용하여 조양은을 공격하였고, 이동재의 개입으로 인해 김태촌의 서방파,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동재파로 알려진 호남 지역의 3대 조폭 간의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가며 나이가 든 두 사람의 회고담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조양은은 자기가 주도하여 화해를 제안했지만 김태촌은 배신하고 항쟁을 계속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김태촌은 이러한 회고에서 그때의 만남은 호남 지역의 조폭 선배에 의해 이뤄진 단순한 얼굴뵈기뿐이라고 주장합니다.
1970년대에 서울로 이사를 간 김태촌은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대립을 벌였으며, 1975년에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을 일으킨 후, 조양은의 형님인 오종철을 작업하여 불구로 만들고 은퇴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1976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1977년에는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1978년에 조창조가 신상사에 항복하고 사과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며 이 항쟁은 종료되었습니다.
1976년, 김태촌은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으로 정치계와의 인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김태촌은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이철승 신민당 의원의 사주를 받아들여, 수백 명의 조직원을 동원하여 대낮에 신민당사를 습격하고 전당대회장에 난입하여 난투극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김태촌은 신민당 노동국 차장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공천 약속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김태촌은 25세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7년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그 후로는 힘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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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폭력 혐의로 구속되어 1986년에 출소한 뒤 김태촌은 민중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총재로 선출된 유한열 의원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또한, 김대중-김영삼 세력이 결합하여 창설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의장 권한대행인 김상현을 도왔다고 주장합니다.
김태촌은 김상현을 자신의 고향 선배로 존경하며 도움을 제공했고, 김상현이 정권의 표적이 되자 남산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김태촌은 재야민주화 운동을 하던 장영달을 숨겨주다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과 사실 관계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해찬 국회의원이 민청련 30주년 추모식에서 김근태 의원을 추모하면서 "당시 근태형이 김태촌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김태촌이 운동권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서 숨겨주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교도소에서 대장 노릇하던 조폭들과 학생 운동을 하다가 교도소에 간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김태촌과의 친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986년에 출소한 김태촌은 뉴송도호텔 사장을 칼로 난자한 사건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김태촌이 박남용 부장검사의 사주로 일어난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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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태촌을 거쳐 전국구 조직폭력배가 된 사례 중 하나가 안토니파의 보스인 안상민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상민은 주먹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뗀 상태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986년, 김태촌은 징역 5년과 보호감호 10년이 선고되어 복역한 뒤, 1989년 1월에 폐암을 이유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폐암 사유로 석방되던 중에도 전락원과 정덕진 사이의 카지노 및 오락실 분쟁에 개입하여 정덕진 편에서 서서 전락원 파라다이스 투자개발 회장측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1989년 6월에 다시 서방파를 재결성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1991년 9월 10일에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1992년 2월 14일에 저지른 죄에 비해 형량이 무겁다고 판단되어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7년이 선고되어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 건강을 이유로 진주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의 체류 중에 1999년에 가수 이영숙과 옥중결혼을 맺기도 했습니다.
2004년 9월 14일, 김태촌은 법원에 보호감호 취소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었습니다. 그 후 2005년 7월에 사회보호법이 폐지되면서 장기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김태촌은 출소 후에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삶과 권력의 어둠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나는 권력 하수인이었다"라고 자신의 삶을 평가하며 폭력배의 수장으로서의 역할과 삶을 반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생애는 여러 논란과 사건에 휘말린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김태촌은 배우 권상우의 집을 피바다로 만든다는 협박을 한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해당 사건은 강요미수죄로 기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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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의 핵심 논란은 "강요미수죄"에서 "의무 없는 일"을 강요해야 하지만, 김태촌은 권상우의 일본 팬미팅 공연을 강요한 것으로 "의무 있는 일"로 인식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판결은 형법의 강요죄 파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도소 수감 시절에 교도소 간부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사실도 있습니다.
김태촌은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펼쳤으며, 1990년과 2006년에 야쿠자와 연계한 기사가 있어 야쿠자와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건강은 오랜 기간 동안 좋지 않았습니다. 1989년에 40대였을 때 폐암 진단을 받았으며, 1990년에 폐암을 호소했지만 당시 원자력 병원에서는 폐암설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나 폐 절제 수술을 통해 2013년까지 생존했습니다.
2012년에는 심장마비로 중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의 조직의 부하들이 간호사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013년 1월 5일, 김태촌은 서울대병원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500여 명의 조직폭력배가 참석했으며, 유명인들과 야쿠자 및 삼합회에서도 조문을 보내는 등 화환이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은 장례식장에서 사태를 우려하여 집중감시병력을 늘렸으나 평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김태촌과 친분이 있는 많은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야쿠자와 삼합회에서도 조문을 보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알려진 나모는 2013년 2월 12일에 납치당하였지만 도주하여 경찰에 신고한 이른바 희한한 납치사건에 대한 분석이 다양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나모는 사실 그다지 거창한 타이틀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으며, 해당 사건에 대한 관련성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모씨는 2015년에 폭력행위로 구속되었으며 대법원은 그를 범서방파의 조직원으로 인정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한 판결을 확정시켰습니다. 판결에 따르면, 나모씨는 1986년 뉴송도 호텔 사장 황익수의 피습 사건에 가담하고 7년간 감옥에서 수감한 후 범서방파에 가입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조 씨 측에서는 "김태촌의 양아들인 김모 씨가 김태촌 조직의 현 실세다"라고 주장했지만, 취재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모 씨가 김태촌 조직의 실체라고 주장하기에는 블러핑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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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진실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 납치사건이 한 중견 기업을 주가조작한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이 기업을 주가조작한 세력 중 일부가 위 납치사건과 관련된 조직들의 행동일 수 있다는 의심이 있습니다.
1990년 후반 이후로 조폭들은 단순한 폭력조직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기업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조폭들은 유흥업소와 주류유통부터 건설업, 대금업, 주식거래, 벤처캐피털과 같은 합법적인 금융업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직 이름인 '서방파'는 김태촌의 고향인 서방면(현재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대)에서 파생되었으며, 이 이름은 경찰이 부여한 것입니다. 보통 이와 같은 'XX파' 식의 단체 이름은 검·경에서 수사 및 관리 편의를 위해 붙이며, 조직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명명 방식에는 보스의 이름을 따오거나, 주요 유흥업소 이름이나 지역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폭들은 합법적인 단체명인 ○○상인연합회나 ◇◇상가번영회를 사용하거나 위장기업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실천은 상대적으로 최근 20년 동안의 추세이며, 더 과거에는 조직 두목이 직접 이름을 짓기도 하거나, 활동 영역의 유명한 지명이나 건물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급의 조직끼리는 사법기관에서 제공한 조직명에 두목의 이름이 들어간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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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반적으로 언론에서는 사법기관이 지정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현재는 조폭들이 직접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 4조가 적용되어 최고 사형까지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김태촌을 비롯한 조직폭력배들은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조폭들을 소재로 한 영화 "친구"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그리고 게임 "회색도시2(선진화파)"가 이 시기의 상황을 다루었습니다.
양은이파의 조양은, 범서방파의 김태촌, OB동재파의 이동재를 포함하여 70~80년대에 3대 조폭으로 불리지만, 이들이 전국적으로 지배하는 보스들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전의 3대 패밀리들의 후계자들이 진정한 전국구로 여겨집니다. 김태촌은 신상사, 조일환, 이강환, 정종원, 이승완 등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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