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미국인 유엔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없는 공동경비구역으로, UN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미루나무가 시야를 방해하여 위협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8월 3일에 UN군 경비대 작업반은 미루나무를 자르는 것을 권고했습니다.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하였지만 북한군의 간섭으로 작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UN군은 미루나무를 가지치기로 작업을 변경하였고, 8월 18일에 가지치기 작업을 수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한국인 노무자 5명과 UN군 병사들이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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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이 작업에 반발하여 항의했지만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설명하였고, 북한군도 이에 수긍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에 박철 중위 등 북한군 장교 2명과 15명의 병력이 나타나, 작업 중단을 요구하였습니다.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북한군은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철 중위는 UN군 병사들을 폭행하고, 보니파스 대위를 살해하였으며, 이에 다른 UN군 병사들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UN군과 북한군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많은 희생자들을 낸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대외조사부 부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후계자 수업을 듣던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김정일은 전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의 경위를 다르게 설명하며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북한 측)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자신들에게 도끼를 던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미군 장교를 살해한 경위는 "우리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미군들에게 다시 던졌다"고 설명하며 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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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 상황에서 미군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대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다른 동유럽의 사회주의 공화국들도 북한을 비난하며 이 사건을 비난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미군 장교가 살해당했지만, 그가 UN군 소속의 장교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미국은 이 사태에 대해 분노하며 북한을 비난하였고, UN군 사령관이었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사건을 듣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즉시 회의를 소집하고 박정희 대통령과 논의한 뒤, 데프콘 3를 발동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북한과 미국 간의 긴장 상황이 더 악화되고 전쟁이 발발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주둔 중인 UN군과 미군뿐만 아니라 보고를 받은 미국 본국의 중앙정부도 강경한 대응을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이례적으로 약 1만 2천 명의 미육군과 1800명의 미 해병대가 추가 배치되었고, 미 해군 7함대와 B-52 전략 폭격기 3대까지 추가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로써 당시의 미국 정계는 좌파나 우파, 정당이나 파벌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미군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한 약한 입장을 비판당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비판을 덮어야 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즉시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열려 키신저 국무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미 해군 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석했습니다.
2023.11.06 - [미스테리,사건사고] - 14좌 등반 전문 산악인 철의여인 클라이머 고미영
14좌 등반 전문 산악인 철의여인 클라이머 고미영
고미영은 대한민국의 여성 산악인으로, 한국 여성 산악계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성 산악인으로서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3개를 등정하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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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하며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여야 했다'고 분노를 터뜨렸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습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공격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8월 19일에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북한 측은 여전히 경비장교 회의를 주장하며 미국의 사과를 받으려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 회의가 동시에 열렸으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데프콘 3를 발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하고, 북한군도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하여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습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남한은 북한과의 긴장 상황을 겪으면서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미군과 한국 제1공수여단의 지원으로 미루나무 벌목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습니다.
1976년 8월 21일, 미국 본토와 대한민국 주변 국가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편성하였습니다. 이 병력은 주로 북한이 미루나무 벌목 중에 총격을 가할 경우에 대비한 것으로, 단순한 벌목 병력보다는 더 큰 규모와 장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공대지 핵미사일 AGM-69 SRAM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폭기 20대가 아이다호 주 마운틴 홈 기지에서 대구 비행장으로 전진 배치되었습니다.
오산 공군기지에 주둔하는 주한 미 공군 F-4 전폭기가 긴급발진하였습니다.
B-52 전략폭격기 3대가 괌에서 발진하여 한반도 상공에 전개되었으며, 군산비행장에 주둔한 미 공군 F-4 전폭기와 대한민국 공군의 F-5 전투기 및 F-86 전투기가 엄호를 제공했습니다.
2023.11.05 - [미스테리,사건사고] - '고문은 예술이다.' 군사독재시절 악랄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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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미공군 18전비 소속 F-4 전폭기 24대가 발진하여 한반도 상공에 전개되었습니다.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 F-4 전폭기가 발진하여 한반도 상공에 전개되었습니다.
미 해군 제7함대와 함재기 65대,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및 순양함 5척이 서해안에 대기하였습니다.
총 12,000명의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며, 이 중에는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 1,800명도 포함되었습니다.
미 육군 정예병력으로 20여대의 차량과 813명 규모의 태스크포스 비에라(Task Force Viera)를 편성하였습니다.
미군 M728 전투공병전차가 165mm M135 파괴포를 갖추고, 임진강에 도하를 준비하기 위해 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비무장 지대 근처에 미 육군 방공포병 부대의 호크 대공미사일이 전진 배치되었으며, 한미연합군 보병부대와 자주포들이 대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은 만약 북한이 미루나무 벌목 중에 총격을 가하면 휴전선의 문제, 서해안 정리,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수복 등을 고려한 증원 병력으로 계획되었습니다.
미군은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협조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만약 도발이 발생하면 즉각 대응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북한의 추가 도발을 방지하고 미군 및 연합군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76년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서는 미군과 대한민국 육군의 특수부대가 합동하여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미 해군은 제7함대의 가용 전력을 동원하고, 미 공군은 괌의 폭격기를 투입하였으며, 미 육군도 12,000명의 병력 증원을 계획하는 등 거의 모든 육해공군의 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이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가 발령되었으며, 이는 전시 경계 상태를 나타냅니다.
2023.11.05 - [미스테리,사건사고] - 일제강점기 반민족 친일 인간쓰레기 고문기술자 하판락
일제강점기 반민족 친일 인간쓰레기 고문기술자 하판락
하판락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독립운동가와 기독교도를 가혹하게 고문하며 나쁜 평판을 얻었던 친일 경찰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부유한 사업가로 살아갔다는 사실이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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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군 공동경비부대와 미 육군 공병 부대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을 확보하고 미루나무 벌목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미 육군 공병들은 미군 공동경비부대를 엄호하면서 미루나무를 절단하였으며, 북한군은 이에 대해 무력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은 판문점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였지만, 미군에게 직접 대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미군은 보복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작전은 종결되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의 특전사 결사대가 투입되어 미루나무 벌목 작업을 엄호하고, 보복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의 초소를 파괴하였고, 북한군은 이에 대해 무력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교전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종결되었습니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무력 대응할 경우 사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사살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작전에서 미군과 대한민국 군이 결사적으로 행동하고 북한군의 무력 대응을 막았으며, 작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긴장 상태가 유지되었지만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나무 벌목 작업을 주목적으로 하였으며, 북한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전쟁을 수행할 의도는 없었으며 무력 시위에 그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 초소를 공격한 데 대해 미국 군에게 경고하지 않은 채 급발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특전사 대원들이 미루나무 벌목 후에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갔을 때, 북한군은 당혹해하였습니다. 이에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하여 특전사 결사대를 제지하였으며, 특전사 대원들은 북한군과 미 육군 트럭 운전병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2023.11.01 - [미스테리,사건사고] - 탑승자 전원사망 1982년 발생한 제주 C-123 수송기 추락사고
탑승자 전원사망 1982년 발생한 제주 C-123 수송기 추락사고
1982년 2월 5일, 제주 C-123 추락사고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에서 어두운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고는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육군 장병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탑승한 C-123 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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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나무 벌목 작업 중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하더라도 대규모 반격을 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 침묵하였고 작전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판문점 주변의 경계가 확실한 콘크리트 경계로 대체되었고, 양측 초소 중 일부가 철거되었습니다.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되어 방문객들에게 공개되었으며,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판문점은 미국과 북한 간의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 장소가 되었으며, 양측 간의 접촉이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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